2013년 9월 24일 화요일

손양원 목사님의 감사기도

 여러분 내 어찌 긴 말의 답사를 드리리요내가 아들들의 순교를 접하고 느낀 몇 가지 은혜로운 감사의 조건을 이야기함으로써 답사를 대신할까 합니다.

첫째, 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들이 나오게 하셨으니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둘째, 허다한 많은 성도들 중에 어찌 이런 보배들을 주께서 하필 내게 맡겨 주셨는지 그 점 또한 주께 감사합니다.

셋째, 3남3녀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두 아들 장자와 차자를 바치게 된 나의 축복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넷째, 한 아들의 순교도 귀하다 하거늘 하물며 두 아들의 순교이리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다섯째, 예수 믿다가 누워 죽는 것도 큰 복이라 하거늘 하물며 전도하다 총살 순교 당함이리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여섯째, 미국 유학 가려고 준비하던 내 아들,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에 갔으니 내 마음 안심되어 , 하나님 감사합니다.

일곱째, 나의 사랑하는 두 아들을 총살한 원수를 회개시켜 내 아들 삼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여덟째, 내 두 아들의 순교로 말미암아 무수한 천국으 아들들이 생긴 것이 믿어지니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아홉째, 이 같은 역경 중에서 이상 여덟 가지 진리와 하나님의 사랑을 찾는 기쁜 마음, 여유있는 믿음 주신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께 감사 감사합니다.

끝으로, 나에게 분수에 넘치는 과분한 큰 복을 내려 주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립니다. 


감사기도를 한 후 손양원 목사님은 두아들을 위한 장례예배 때 감사헌금 1만원을 하나님께 드렸다고 합니다.
당시 손목사님의 월급은 고작 80원이었습니다.

감사헌금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두 아들의 순교를 감사하며, 1만원, 손양원.'

이 후 손목사님은 아들을 죽인 안재선을 양자로 함아 손재선이란 이름으로 개명 시킨 후 목회자로 키워내는 기적을 이루었습니다.

2013년 9월 11일 수요일

주기철 목사님의 마지막설교


주기철 목사님의 마지막 설교.
참고: http://www.facebook.com/notes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나는 지난 7개월 동안 감옥에 있으면서 특별히 다섯 가지 종목을 들어 기도하는
시간이 많았습니다.이 시간 그 기도내용을 중심으로 사랑하는 성도들 앞에 "5종목의 나의 기원"이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잠시 기도)
 "오, 하늘에 계신 거룩하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시여. 이번에야말로 순교의 영광을 허락하시는가 싶더니 또 풀어주시어 이렇게 강단에 다시 서게 되었나이다.아직까지 제가 받은 핍박과 고난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분량에 이르지 못한 걸 알고 있사오나, 할 수만 있다면 이 고통스런 육신을 떠나 하루라도 빨리 주님과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옵나이다.
사랑하옵는 주님이시여!
저희들을 붙들어 주시옵소서! 저 간악한 마귀의 흑암권세로부터 지켜주시옵소서!
우리의 믿음이 꺾이지 않도록 주님의 강하신 손으로 붙잡아 주시옵소서!
빛되신 주님의 생명의 말씀으로 저 어두움의 사망권세를 물리칠 수 있도록 붙들어 주시옵소서!
저 불쌍한 어린양들을 천국 가는 길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인도하시옵소서!
이제 이 종이 선포하는 주님의 말씀에 은혜 받고 힘을 얻어서 주님의 뒤를 따르는 일사각오(一死覺悟)의 믿음이 있도록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5종목의 나의 기원!
첫 번째 저의 기도는
"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하여 주옵소서"입니다. 나는 바야흐로 죽음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내 목숨을 빼앗으려는 검은 손은 시시각각으로 내 가까이에 뻗어오고 있습니다. 죽음에 직면한 나는 "사망의 권세를 이기게 하여 주옵소서"하고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릇
생명이 있는 만물이 다 죽음 앞에서 탄식하며, 숨쉬는 인생은 모두 다 죽음 앞에서 떨고 슬퍼합니다.
사망의 권세는 마귀가 사람을 위협하는 최대의 무기인 것입니다. 죽기가 무서워 의를 버리고 죽음을 피하려고 믿음을 버린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도의 우두머리 베드로도 죽음이 두려워서 가야바의 법정에서 예수를 부인하고 계집종 앞에서도 세 번이나 맹세하였으니 누가 감히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장담하겠습니까?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후에 사람은 다 죽었습니다.
제왕(帝王), 장상(將相), 재사(才士), 가인(佳人)도 다 죽었고 성현(聖賢), 군자(君子), 위인(偉人),걸사(傑士)도 다 북망산(北邙山)에 가 묻혔습니다. 죄 없이 억울하게 죽는 약자도 불쌍하지만, 사랑하는 아내를 두고 죽는 사람, 가엾은 아이를 두고가는 어머니의 비참한 죽음도 허다합니다.


폐결핵 환자로 요양원에 눕지 아니하고 예수의 종으로 감옥에 갇히우는 것은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자동차에 치여 죽는 사람도 있는데 예수의 이름으로 사형장에 나가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최대의 영광입니다.
주님을 위하여 수백 번의 죽음을 당한들 무슨 후회가 있으리오만은, 주님을 버리고 천 년 살고 만 년 산다한들 그 무슨 저주스런 삶이리오!

오 주여!
이 목숨을 아끼어 주님을 욕되게 마옵소서!
주님은 영원토록 찬양 받으실 영광의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은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머리에 가시관을 쓰시고 두 손과 발이 쇠못에 찢어져 최후의 피 한 방울까지
다 쏟으셨습니다. 주님 나를 위하여 죽으셨거늘 내 어찌 죽음을 무서워하겠습니까?
다만 일사각오(一死覺悟)가 있을 뿐이올시다.


(설교 중간에 잠시 기도) 십자가에 죽으시고 무덤 속에서 3일만에 부활하신 주님!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여! 이 부족하고 연약한 종에게 부활의 믿음을
굳게 하사 나도 부활을 믿고 사망의 권세를 내 발 아래 밟게 하소서!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나는 부활하신 예수를 믿고 나도 부활하리로다! (아멘! 할렐루야!!!)

(발을 쾅 구르며) 나의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그리스도의 사람은, 살아도 그리스도인답게 살고, 죽어도 그리스도인답게 죽어야 합니다.
죽음이 무서워 예수를 저버리지 마십시오!
풀의 꽃과 같이 시들어 떨어지는 목숨을 아끼다가 지옥에 떨어지면 이보다 두려운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한 번 죽어 영원한 천국의 복락을 얻는다면 이보다 즐거운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 주 목사가 죽는다고 결코 슬퍼하지 마십시오.
나는 내 주님 밖의 다른 신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살 수는 없습니다.
더럽게 사느니보다 차라리 죽고 또 죽어 주님 향한 정절을 지키려 합니다.
주님을 따라 나의 주님을 따라서 가는 죽음은 나의 소원입니다. 나에게는 일사각오가
있을뿐입니다.

소나무는 죽기 전에 찍어야 푸르르고 백합도 시들기 전에 떨어져야 향기롭습니다.
세례요한은 33세, 스데반도 청장년에 뜨거운 피를 뿌렸습니다. 이 몸도 시들기 전에 주님 제단의 제물이 되겠습니다.
나에게는 오로지 일사각오가 있을 뿐입니다.


나의 두 번째 기원은
"장기간의 고난을 견디게 하여 주옵소서"입니다. 저는 이 제목을 가지고 항상 기도했습니다. 그들의 고문이 끈질긴 만큼
나는 더욱 기도하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입니다. 단번에 받는 고난은 이길 수 있으나 웬만한 믿음 가지고는 오래오래 끄는
장기간의 고난을 참기 어렵습니다.
칼로 베고 불로 지지는 형벌이라도 단 번에 죽어진다면 그래도 이길 수 있으나,
한 달 두 달, 1년, 10년 계속하는 고난은 참으로 견디기 어렵습니다.
그것도 절대 면할 수 없는 형벌이라면 할 수 없이 당하지만 한 걸음만 양보하면 그 무서운
고통을 면하고 도리어 상 준다는 데 많은 사람들이 넘어갑니다.
말 한 마디만 타협하면 살려 주는 데는 용감한 신자들도 넘어지게 됩니다.
하물며 나같이 연약한 약졸(弱卒)이 어떻게 장기간을 견디어 배기겠습니까?
다만 주님께 의지하는 것뿐입니다.
예수께서는 끝까지 참는 사람은 구원을 얻으리라(마 24:14)고 신신부탁하셨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주님도 십자가를 직면하자 그 받으실 고난을 인하여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 흘려 기도하시고 십자가상에서 그 혹독한 고통을 이기셨습니다.
두 손과 두 발이 쇠못에 찢어질 때, 그 고통이 어떠하였으리요!
나와 여러분의 피, 억만 죄인의 죄짐을 대신 지실 때
그 고통이 너무나 심해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그 고통의 소리를 우주도 감당하지 못하여 태양도 빛을 잃고
그 고통의 핏방울은 땅도 감당할 수 없어, 지축이 흔들리어 지진이 터졌던 것입니다.

내 주 예수 날 위하여 이렇게 고난을 참으셨는데
내 당하는 고난이야 그 무엇이겠습니까?

"믿음의 주요 온전케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


그러므로 처음에는 우리가 십자가를 지지만 나중에는 주님의 십자가가 우리를 지어줍니다.

십자가, 십자가 내 주의 십자가만 바라보고 나아갑시다.

나의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현재의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이제 받는 고난, 길어야 70 년이요, 장차 받을 영광은 천 년 만 년 영원무궁합니다.
지금 받는 고난은 어차피 한 번 죽어 썩을 몸이 죽는 것 뿐이요,
장차 받을 영광은 예수의 부활하신 몸과 같이 영생불사의 몸이며 영원 영화의 몸입니다.
야고보서 5장 7절에도 "그러므로 형제들아,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고 하셨습니다.
주님 재림하시는 그 날 우리 모두는 부활할 것이며, 우리 앞에는 천국 가는 밝은 길이
펼쳐질 것입니다.
주님을 위하여 오는 고난을 내가 이제 피하였다가 이 다음
내 무슨 낯으로 주님을 대하겠습니까?
주님을 위하여 이제 당하는 수욕(羞辱)을 내가 피하였다가 이 다음 주님이
"너는 내 이름과 평안과 즐거움을 다 받아 누리고, 고난의 잔은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나는 대답할 말이 없습니다.


나의 세 번째 기원은
"노모(老母)와 처자(妻子)를 주님께 부탁합니다"입니다. 저는…… 80 이 넘은 어머님이 계시고 병든 아내가 있고 어린 자식들이 있습니다. 남의 아들로의 의무도 지중하고 남의 가장, 아비된 책임도 무겁습니다.


자식을 아끼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으며 부모를 생각하지 않는 자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내 어머님이 나를 낳아 애지중지 키우고 가르치신 은혜가 태산같이 높습니다. 어머님을 봉양하지 못하고 잡혀 다니는 불효자의 신세, 어머님 생각이 더욱 간절합니다. 내 어머님은 금지옥엽(金枝玉葉)으로 키우신 이 몸이 남의 발길에 채이고 매맞아 상할 때 그 가슴이 얼마나 아프시겠습니까?
춘풍추우(春風秋雨) 비바람이 옥문에 뿌릴 때에, 고요한 밤 달빛이 철창에 새어들 때에
어머니 생각 간절하여 눈물 뿌리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어머님을 봉양한다고 하나님의 계명을 범할 수는 더욱> 없습니다. 주님, 십자가에 달리실 때 당신의 아픔도 잊으시고 십자가 밑에서 애통하는 어머님을 재차 요한에게 부탁하실 때의 심정 어떠하셨을까요? 십자가 밑에서 가슴 치며 애통하시는 마리아의 아프신 가슴 어떠하셨을까요?
오! 당신 어머님을 요한에게 부탁하신 주님께 내 어머님도 부탁합니다. 불효한 이 자식의 봉양보다 무소불능 하신 주님께 내 어머님을 부탁하고 나는 주님 자취를 따라 가렵니다연약한 나를 붙들어 주옵소서! 사랑하는 어머님을 80넘어 늙으신 내 어머님을 자비하신 주님께 부탁합니다.


그리고……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가 남편을 연모하는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내 아내는 병약한 사람으로 인생을 내게 바치었거늘 나는 남편된 의무를 못합니다.병약한 아내를 버려 두고 잡혀 다니는 내 마음 또한 애처롭습니다 오! 주님께서 당신의 신부 되는 어린 교회를 뒤에 두고 골고다로 나가시는 심경이 어떠하셨습니까? 병든 내 아내도 주님께 부탁하고 불초(不肖) 이내 몸은 주님의 자취, 주님의 눈물의 자취를 따라 가렵니다. 연약한 나를 붙들어 주옵소서.

세상에 제 자식 돌보지 않는 자 어디 있으며 자기 아버지를 의지하지 않는 자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나도 4명의 아들이 있어 어린것도 있습니다. 아버지로서 자식을 키우고 가르칠 의무를 다하지 못하고 우는 어린것을 뒤에 두고 잡혀 다니는 마음 또한 애처롭기 한정 없습니다. 아버지가 나라의 역적으로 잡혀 죽으면 그 자식들이 어디서 어떻게 살 수 있겠습니까? 짐승도 제 새끼를 사랑하거든 어린 자식을 두고 죽음의 길을 떠나지 않을 수 없는 내 마음 끝없이 처절합니다.
주님,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에 당신의 자식 같은 제자들을 앞에 모으시고 하시는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눈물어린 말씀이었고 교훈하시는 말씀 말씀이 피끓는 소리였습니다. 어린 자식과 같이 연약한 제자들을 뒤에 두시고 십자가에 달리시는 주님의 마음 어떠하셨으리이까? 연약한 제자들을 뒤에 두시고 골고다로 향하신 주님께 저의 자식도 부탁합니다. 그리고 이미 죽은 저의 자식들도 주님 품에 부탁합니다.


생사화복(生死禍福)을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아버지시여! 저에게는 주님께서 맡기신 양떼, 사랑하는 교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저들 내 양떼를 뒤에 두고 다시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험한 세대, 악한 세상의 이리떼 중에 내 양들을 두고 떠나지 않으면 안됩니다. 맡기나이다. 대목자장이신 예수님 손에 이들을 맡기옵니다.

저의 어머님도 주님께 부탁하나이다. 저의 병든 아내도 주님 손에 부탁하는 것이 이 못난 사람의 도움보다 좋은 줄 압니다. 저의 어린 자식들도 자비하신 주님 품에 두는 것이 변변치 못한 아비의 손으로 기르는것보다. 복될 줄 믿습니다.
나의 양떼도 선한 목자 주님께 부탁합니다. 병들고 상한 자를 주님이 싸매어 주시고 낙심하고 범죄한 자를 주님 보혈로 사유하여 주옵소서. 악하고 험한 세상에 양떼를 두고 가는 이 마음 차마 못할 일이올시다. 저들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 주님 지켜 주옵소서.

나는 마지막으로 이 산정재의 강단을 떠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을 따라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렵니다.

(떨리는 목소리, 깊은 흐느낌, 흐르는 눈물, 흐느끼는 회중. 감시하던 일본 형사들도 슬금슬금 교회당 밖으로 나가버림)

나의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나는 내 어머니, 내 아내, 내 자식들을 여러분께 짐 지울 마음은 없습니다.
다만 무소불능(無所不能하신 하나님께 부탁합니다
여러분! 사람이 제 몸의 고통은 견딜 수 있으나 부모와 처자를 생각하고 철석같은 마음도 변절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린 자식이 목메어 우는 소리에 순교의 길에서 돌아선 신자도 허다합니다. 인간의 얽히고 얽힌 인정의 줄이여, 나를 얽어매지 말라! 부모나 처자를 예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우리 주님께 합당치 아니합니다. 그러니 다시 한 번 여러분의 믿음을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나의 네 번째 기원은

"의에 살고 의에 죽도록 하여 주옵소서"입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사람으로서 마땅히 행해야 할 의가 있습니다.
나라의 신민(臣民)이 되어서는 충절의 의가 있고, 여자가 되어서는 정절의 의가 있고,
그리스도인이 되어서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신앙의 정조가 있습니다.
그래서 제갈공명은 무너지는 한(漢)나라를 붙잡고 오장원(五丈原)에서 죽기까지 국궁진쇄
(鞠躬盡鎖) 사이후이(死而後而), 즉 죽기까지 충성했습니다. 인간끼리의 의도 이럴진대,
하물며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야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오직 주를 위하고 또 그 교회와 그 의를 붙들고 "국궁진쇄 사이후이",죽도록 충성하여야만 하지 않겠습니까?

백이(伯夷) 숙제(叔齊) 두 형제는 은(殷)나라의 신민으로서
주(周)나라에서 살 수가 없어 수양산에 숨어 서산(西山)의 고사리를 뜯어먹다가
굶어 죽으니 백세청풍(百世淸風) 모두 그 고상한 인격에 놀라게 만들었습니다.

정몽주는 망하는 고려나라를 위해서 선죽교에다 피를 뿌리니 대(竹)야 났으랴마는
그 절개 대보다 청청창창 시푸르도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건 없건 임향한
일편단심이야 변할 줄이 있으랴!"
 이와 같은 시를 읊은 그의 충절이야말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본받아야 할 귀한 것입니다.

자기가 속한 이 땅,
이 나라에 대한 의가 이러하거늘 하물며 그리스도인이 되어 주님을 향한 일편단심
변할 수가 있으랴!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신앙의 대의를 지키느라 풀무불에도 뛰어들었고,
다니엘은 이스라엘의 정신을 가슴에 품고 사자굴 속에도 들어갔습니다.
이 모두가 오직 예수를 사랑하는 까닭에 믿음으로 행한 일들입니다.
예수를 사랑하니 용광로 같은 풀무불이 두려우랴!
예수를 사랑하니 굶주린 사자굴도 두렵지 않도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고,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달렸습니다.


백제나라의 도미(都彌) 부인은 개루왕의 협박과 부귀의 유혹도 물리치고 두 눈 뽑힌
남편 도미를 찾아 일엽편주 조각배로 만경창파 서해(西海) 바다에 떠서
황주(黃州) 마을 뫼 아래서 한 평생 그 남편을 섬겼습니다.
이는 우리 한국의 딸들이 정절을 지키던 피눈물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의
신부 되어 주님 향한 정절을 변할 수 있겠습니까?
주후 2백년 카르타고의 벨빼추어는 스물두 살의 젊은 나이에 젖먹이와 늙은 아버지의
우는 소리를 뒤에 두고 형장에 나가서 사나운 소뿔에 찔려 죽었습니다.
천고의 열녀(烈女) 벨빼추어는 지금 주님의 나라에서 승리의 찬송을 부르고 있을 것입니다.


못합니다! 못합니다! 이렇듯 그리스도의 진정한 신부는 다른 신에게 정절을 깨뜨리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의 신부는 신사(우상)에 절하지 못합니다.
이 몸이 어려서부터 예수 안에서 자라났고
예수께 헌신하기로 열 번 백 번 맹세했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밥 얻어먹고 영광을 받다가,
하나님의 계명이 깨어지고 예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게 되는 오늘, 이 몸
구구도생이 어찌 말이 됩니까? 아! 내 주 예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는구나! 평양아! 평양아! 예의 동방의 예루살렘아! 영광이 네게서 떠났도다. 모란봉아 통곡하라! 대동강아 천백 세에 흘러가며 나와 함께 울자! 드리리다, 드리리다. 이 목숨이나마 주님께 드리리다. 칼날이 나를 기다리느냐? 나는 저 칼날을 향하여 나아가리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란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 8:35)

이 몸 죽고 죽어 열백 번 다시 죽어도 주님 향한 대의정절 변치 아니하겠습니다.
십자가, 십자가, 주님 지신 십자가 앞에 이 몸 드립니다.
우리 초로 인생 살면 며칠입니까? 인생은 짧고 의는 영원합니다.
나의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의에 죽고 의에 살으십시다!
의를 버리고 더구나 예수께 향한 의를 버리고 산다는 것은 개짐승의 삶만
같지 못합니다.

여러분! 예수는 살아 계십니다. 부디 예수로 죽고 예수로 살으십시다.
(흐느끼는 교우들을 바라보다가 찬송가 196장을 소리 높여 부르기 시작)

이 세상 험하고 나 비록 약하나/
늘 기도 힘쓰면 큰 권능 얻겠네./
주의 은혜로 대속하여서/
피와 같이 붉은 죄/눈같이 희겠네……/(3절까지 부른 다음, 숨을 돌려 다시 설교)


나의 다섯 번째 기원은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합니다"입니다. 오 주님 예수여!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하나이다.
십자가를 붙잡고 쓰러질 때,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혹여 옥중에서나 사형장에서나 내 목숨 끊어질 때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아버지의 집은 나의 집,
아버지의 나라가 나의 고향이로소이다.
더러운 땅을 밟던 내 발을 씻어서 나로 하여금 하늘나라 황금길을 걷게 하시옵고
죄악 세상에서 부대끼던 나를 깨끗케 하사
영광의 존전에 서게 하옵소서.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하나이다.

받아주소서! 받아주소서! 아멘!!! 할렐루야!!! 할렐루야!!! 오 주여, 영광 받으옵소서!!! 이 터질 것 같은 벅찬 기쁨을 주신 주님께 모두 감사의 박수로 영광 돌립시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찬송가 384 장을 함께 부름) "내 주는 강한 성이요/방패와 병기 되시니……

--이 후 주목사님은 신사참배 거부로 인한 5번째 수감을 하시게 되었습니다.
1944년 4월 21일 금요일 밤 9시 숱한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주목사님은 평양형무소의 한 귀퉁이에서
49세의 나이로 순교하셨습니다.


목사님께서는 "내 여호와 하나님이여 나를 붙잡으소서"하시고 웃으며 운명하셨다고 합니다.

2013년 9월 9일 월요일

안동교회


경북 안동시에 있는 오래된  "안동교회"입니다
담쟁가 멋스럽네요.

2013년 8월 27일 화요일

선교사 이야기: 문준경 전도사

문준경 전도사




한국교회의 중추적 역할을 감당하는 수많은 목회자들이 문준경전도사가 설립한 섬교회를 통해 배출하였다.

한국의 수많은 순교자 가운데 여성순교자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그 이유는 순교자가 집중적으로 나온 일제시대나 6·25사변 당시는 여성이 사역자로 활동하는 경우가 극히 적었으며 남존여비 사상이 지배적이라 여성의 활동영역이 매우 제한되고 또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성결교단의 문준경(文俊卿·1891∼1950)전도사의 경우는 여성사역자로서 성결교를 대표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녀의 헌신적인 사역과 활동이 순교 49년이 지난 지금까지 많은 교회와 성도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문전도사가 고향인 전남 신안군의 섬들에 설립한 증동리교회,진리교회,대초리교회 등 10여 교회는 오늘날 기독교를 대표하는 수많은 목회자들(김준곤 이만신 정태기 이만성 이봉성목사 등 30여명)을 배출하는 믿음의 산실이 되었다.그녀의 복음전파에 대한 열정과 헌신,사역은 섬을 중심으로 한 호남선교의 한 축을 이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남 신안군 암태면 수곡리의 작은 섬에서 출생한 문준경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부지런해 주위의 칭찬과 기대를 한몸에 받았다.서당에서 글공부를 하고 싶어 했으나 부친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고 1908년 17세의 나이에 신랑의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한 채 중매결혼을 해야 했다.




문준경전도사는 결혼을 했다는 이유로 정규학생이 되지 못했고 그나마 이성봉목사의 추천으로 경성성서학원에 입학해 청강생으로 신학을 공부했다. 1933년의 문준경전도사(점선).

그러나 서로 마음이 합하지 않은 결혼은 두사람 모두에게 고통이었다.외지를 도는 남편은 아내를 돌보지 않은 채 목포에 소실을 두고 자녀까지 낳아 살고 있었고 문준경은 이 때부터 자신은 ‘남편있는 생과부’라며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지내야 했다.그러나 며느리로서 시부모를 극진히 모시고 형제간의 우의를 돈독히 하는 데는 한치의 어긋남이 없었다.그리고 남는 시간을 시부모님의 허락을 얻어 국문을 깨우치고 한문을 공부하는데 할애했다.

자신을 극진히 아껴주던 시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시어머니도 큰 시숙과 생활하게 돼 갈 곳이 없어진 그녀는 목포로 건너와 단칸방에서 삯바느질을 하며 외롭고 고달픈 삶을 살았다.이런 그녀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한줄기 놀라운 빛으로 다가왔다.예수를 믿으면 삶의 기쁨과 감사가 넘친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간 교회가 유명한 성결교부흥사인 이성봉(李聖鳳)목사(당시 전도사)가 초가집 한간을 얻어 막 개척을 시작한 북교동성결교회였다.

이성봉목사의 설교는 미래에 대한 희망도 낙도 없었던 그녀에게 마음의 변화를 일으키게 했다.주님이 주시는 사랑과 평안은 그녀에게 새로운 삶의 기대와 기쁨을 채워 주었다.1년만에 학습과 세례를 받고 개인전도와 축호전도에 가장 열성을 보이는 성도가 되었다.

집사직분을 받은 그녀는 하나님 앞에 자신의 인생을 헌신할 것을 서원하고 죽을 때까지 복음을 전하겠다고 다짐했다.그리고 서울에 있는 경성성서학원(서울신대전신)에서 공부할 수 있게 되길 간절히 기도한 결과 청강생으로 입학을 할 수 있었다.당시 결혼한 여자는 입학할 수 없는 관례가 있었기 때문이다.공부를 열심히 해도 정규학생이 아니라는 이유로 장학금도 받지 못하는 등 어려움을 겪던 그녀는 이성봉목사의 보증과 요청으로 결국 정규학생이 되어 기숙사에도 들어갈 수 있었다.

문전도사의 전도열정은 남달라 방학마다 고향으로 내려가 33년 진리교회를 설립한 것을 시작으로 35년 증동리교회,36년 대초리교회를 차례로 건립했다.방축리에는 기도소를 지었다.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상태에서 오직 믿음만으로 교회를 세운 그녀에게 수많은 어려움과 고초가 쉬지않고 따랐으나 기도는 언제나 승리를 안겨 주었다.

졸업 후에도 대도시를 마다하고 증도로 돌아 온 문전도사는 나룻배를 타고 이섬 저섬 무교회지역을 돌며 교회를 개척하고 복음을 전했다.그녀는 주민들의 부탁으로 짐꾼노릇,우체부노릇을 마다하지 않았고 섬주위 돌짝밭길을 얼마나 걸었는지 1년에 고무신을 아홉컬레나 바꿔신었다고 전해진다.문전도사의 열정적인 기도는 신유의 은사까지 더해 정신병자,중풍병자를 고쳐내 ‘섬 여의사’란 말까지 들을 정도였다.

1943년 일제의 탄압으로 성결교단이 강제해산됨과 동시에 문전도사가 개척한 증도교회에까지 여파가 미쳤다.그녀가 신사참배를 거부했다며 목포경찰서로 불러내 고문을 일삼았다.

이 때마다 문전도사는 찬송가 “환란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지켰네”를 부르며 에스더서 4장16절 “죽으면 죽으리라”를 수없이 되풀이 했다.아무리 회유와 협박이 이어져도 굴욕적인 신사참배는 허락치 않았다.

그런데 해방후 공산당을 따르는 좌익들의 활동은 이 작은 섬까지 영향을 미쳤다.특히 6·25 후 지역 전체가 인민군의 손길에 넘어가자 평소 교회를 못마땅하게 여겼던 이들이 문전도사와 성도들을 못살게 굴었다.

50년 10월 4일.국군이 증동리섬까지 들어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악의에 찬 공산당원들은 교인과 양민들을 바닷가 모래사장으로 이끌어 냈다.그리고 한사람씩 단도로 내려쳐 죽이는 엄청난 만행을 저질렀다.문전도사에게 와서는 “새끼를 많이 깐 씨암탉이구만”이라며 몽둥이로 내리쳤고 그녀는 “아버지여 내 영혼을 받으소서”라는 마지막말을 남기고 이어진 총탄에 의해 순교했다.당시 59세.이 사실은 옆에 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수양딸 백정희전도사에 의해 알려졌다.

문전도사의 헌신과 사역은 한톨의 밀알이 되어 30배,60배,1백배의 열매를 거두었다.그녀가 흘린 피는 영원히 시들지 않는 꽃으로 우리 곁에 남아 있다.


<내가 본 문준경전도사… 김준곤목사(한국대학생선교회 총재)>

내 삶과 신앙에 가장 큰 영향을 준 분이 바로 순교자 문준경전도사님이다.전도사님은 내가 국민학교시절 외롭게 사시던 어머니를 위해 나룻배를 두번이나 갈아타고 찾아오시곤 했다.한아름의 과자선물과 함께 나를 껴안고 간절히 기도해 주시던 기억이 새롭다.문전도사님이 특유의 아름다운 음성으로 희망가나 천당가를 부르면 동네 아낙들이 모두 모였고 이 때부터 일장 전도가 시작됐다.

내가 신학교를 졸업하고 몸이 약해 전도사님이 사역하던 섬에서 3개월간 지낸 적이 있다.교회와 사택은 가난하고 갈 곳 없는 이들의 휴식처였다.밤낮을 가리지 않고 이곳 저곳을 다니며 아기를 받고 병을 치료해 주고 사랑이 가득 담긴 기도를 아끼지 않았다.일제시대에 장티푸스가 나돌아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고 가족도 환자곁에 가지 않는 가운데 “나는 죽어도 홀몸이니 부담이 없다”며 환자를 돌본 이야기는 유명하다.순교 1주년이 된 전도사님의 환갑날,장례추모식장에는 그녀에게 도움을 받은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김구선생 장례식 보다 추모인파가 많다’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추모와 사랑과 존경을 전도사님의 영전에 드린다.

/김무정 moojeong@kukminilbo.co.kr

2013년 8월 26일 월요일

한국 교회 처음 예배당



한국교회 처음 예배당


구본선 지음/장석철 사진/홍성사 펴냄/17,000원
우리나라엔 백 년 이상의 역사를 간직한 교회가 5백 곳이 넘는다. 그중 옛 모습 그대로의 예배당이 남아 있는 곳은 얼마나 될까? 서른 곳도 채 되지 않아 이 한 권의 책 속에 다 담겼다.(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한국 교회의 1세대 예배당 24곳의 역사를 글과 사진으로 엮어낸 이 책에는 저자가 직접 다니며 취재한, 교회마다의 고유한 역사와 신앙이 담겨 있다.

“역사가 오랜 교회에 가면 보물찾기에 열중하게 된다. 가장 먼저 찾은 것은 기도상(祈禱床)이다. 1916년 트롤로프 주교가 내려올 때 서울 교인들이 만들어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가로 버팀목에는 ‘경성성공회 구주강생 1916년’이라 쓰여 있다. …예수원 설립자 대천덕 신부의 부인 현재인 사모가 1973년에 그린 성화를 안 보고 갈 수 없다. 성자 마르틴을 그린 것이다.”(136~137쪽)
성자 마르틴은 음성교회의 수호성인으로, 지나가는 거지에게 자신의 망토 반을 잘라주었다는 4세기 프랑스 주교다. 예부터 충북 음성은 가난한 동네다. 성전을 지을 능력이 없던 교인들은 ‘부자 현씨’ 집안에서 집을 새로 짓는다면서 헐어 버린 집의 목재를 가져와 성전을 지었다. 음성에 있는 성공회 예배당 중 세 곳이 기독교 문화재이나, 이 교회는 헌 집을 뜯어다 지었기 때문에 문화재 가치가 없다는 평가를 받았단다. 고유의 역사, 무형의 역사를 보지 못한 탓이다.

서울 승동교회도 기둥이 전혀 없이 지어진 예배당을 지켜내고 있다. 세월의 무게 앞에 곳곳에 균열이 생기고, 붕괴의 위험이 있어도 꿋꿋이 교회당을 지켜가고 있다. 예배당은 곧 교회 공동체가 간직하고픈 고유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낡은 건물을 허물고, 크고 웅장한 교회 짓기를 즐기는 이유는 어쩌면 지키고픈 추억이 없어서는 아닐까.

《한국 교회 처음 예배당》은, 언제 어떻게 헐리게 될지 모를 교회의 모습을 담았기에 더욱 의미 있는 책이다. 부록에는 이들 교회의 주소와 관련 정보가 실렸다. 직접 방문해서 신앙 선배들의 ‘처음 믿음’들을 온몸으로 느끼라는 배려일 것이다. 

2013년 8월 23일 금요일

선교사이야기: A. B. 터너

한국 성공회는 코르프에 의해서 1890년 시작되었습니다. 성공회 선교사들은 한국어와 문화를 익히면서 
몇 해 동안 선교를 준비하였습니다. 
이들 성공회 선교사들은 거의 옥스포드와 캠브리지 대학교 출신의 엘리트들이었습니다.
선교사들은 1896년 성탄절 전야에 비로소 몇 사람에게 성세를 베풀었고 점차 교회로서 형태를 갖추어갔습니다. 이 무렵 터너가 한국에 들어왔습니다.
그는 옥스포드대학을 졸업하고, 
사제로 서품을 받은 지 8년 만에 한국에 부임하였습니다.
터너는 1904년 초대 코르프를 이어 제 2대 주교가 된 후 주로 인천과 강화도에 집중되어 있던 성공회의 선교 영역을 수원과 충북 진천까지 확대하였습니다.
터너는 YMCA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하였는데, 1907년에서 1910년 한일합방에 이르는 어려운 시기에 YMCA 회장을 맡으면서 이상재, 윤치호 등의 항일운동을 뒷받침하였습니다.
터너는 미국 백화점왕 워너메이커의 후원으로 YMCA의 새 건물을 신축하는 일도 추진하였으며,
상동교회 출신의 전덕기와 YMCA의 이상재, 이승만, 김규식 등을 규합하여서 기독교 연합 세력을 만드는 일에도 힘썼습니다.
터너는 신자들에게 다음의 신앙 원리를 가르치고 직접 실천하였습니다. 
첫째, 현실 문제를 도외시한 신앙은 죽은 신앙이다.
둘째, 성공회 신자들은 친일 단체인 일진회에 절대로 동참해서는 안 되고 불의와 싸우는 항일운동에 참여하여야 한다.
셋째, 기복적인 신앙을 추구해서는 안 되고 순수한 동기로 신앙을 가져야 한다.
그는 외국인 선교사가 교회를 직접 경영하면서 모든 경비를 전담하는 것은 장기적으로 많은 문제를 야기할 것이므로 한국교인들에 의한 자치와 자립을 추구하였습니다.
이런 뜻에 따라 교인들 스스로의 힘으로 세워진 교회로는 강화 온수리교회와 진천교회 등이 있습니다. 강화 온수리교회 뜰 안에는 그의 덕을 기리는 공덕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참고:  http://www.yanghwajin.net/v2/mission/mission_15.html

선교사이야기:레이놀즈

레이놀즈는 남장로회 개척 선교사이면서 한글성경번역에 크게 공헌하였던 선교사입니다.
그는 햄펀시드니 대학을 최우등으로 졸업하였는데, 특별히 언어에 재능이 많아서 신학교에서 성서원어와 라틴어를 열심히 공부하였습니다.

레이놀즈가 한국에 선교사로 오게 된 것은 언더우드의 영향 때문이었습니다.
언더우드는 안식년 기간에 미국에서 열린 해외선교 신학교연맹 대회에서 한국선교에 대해서 연설하였는데, 마침 그 곳에 있던 레이놀즈와 몇 사람의 신학생들은 크게 감동을 받아서 한국선교를 자원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들이 소속된 남장로회 선교부와 교회 어디에서도 한국선교에 관심이 없어서 선교후원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언더우드의 친형과 언더우드가 남장로회에 이들의 선교비 명목으로 3천 달러를 헌금해서 이들은 마침내 1892년 한국으로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이들이 레이놀즈 부부를 비롯한 7인의 남장로회 개척 선교사들이었습니다. 이듬해 열린 장로회선교사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남장로회는 전라도와 충청도 지역에서 주로 선교활동을 펼치게 되었습니다.
레이놀즈는 전라도 여러 곳을 다니면서 선교활동을 하였습니다.
레이놀즈는 1895년 성경번역위원회 남장로회 대표로 선임되면서,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는 일에 매진할 수 있었습니다.
성경번역은 외국인선교사와 한국어 선생의 공동작업이라고 할 만큼 한국어 선생의 역할은 지대할 수 밖에 없었는데, 레이놀즈가 한글성경번역에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박학다식한 한국어 선생 김필수의 공이 컸습니다.

파나마 운하를 건설하는 것에 비유될 수 있을 정도로 성경번역의 과정은 길고 힘든 여정이었습니다. 하지만 끈기있게 일을 진행하던 레이놀즈는 마침내 그 열매를 보게 되었습니다.
한 권씩 개인역이나 수정역으로 나오던 신약 전체를 묶어서 1900년 단권 신약성경을 출판한 것입니다. 출판된 성경에서 여러 가지 오류가 발견되자 레이놀즈와 언더우드, 게일은 아예 성경번역에만 매달립니다.
이들은 1902년 부터 1906년까지 무려 555회의 토론과 수정 과정을 거친 후에 최초의 공인역본 신약전서를 출판하였습니다.
히브리어에 정통하였던 레이놀즈는 1910년 구역성경의 출판에서도 주역의 역할을 하여서,
신·구약 성경 한 권이 온전히 출판되는 일에 쓰임 받았습니다.
레이놀즈는 1917년부터 20년 동안 평양장로회신학교 어학교수와 <신학지남> 편집인으로도 일하였습니다.
신학지남은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에서 간행한 기독교신학연구지로,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 교수들의 신학연구논문을 출판하기 위하여 만든 책이며, 장로교회의 신학이해와 신앙영위를 제시해주는 동시에 목사들의 신학 연구를 북돋고 뛰어난 목회자, 설교자가 되도록 도와주기도 했습니다.
이 연구지는 현재까지도 장로회 신학대학측의 <교회와 신학>, 총신대학측의 <신학지남>으로 계속 간행되고 있습니다. 양화진에는 채 한 살이 되기 전 한국에서 죽은 맏아들과 미국에서 76세로 죽은 둘째 아들의 무덤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참조: http://www.yanghwajin.net/v2/mission/mission_14.html

선교사 이야기: 헤론

양화진에 최초로 안장된 인물은 헤론입니다. 헤론은 테네시 대학 의대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이미 20대에 모교의 교수로 초빙 받은 수재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수재로서 보장된 길을 선택하지 않고, 헤티와 결혼한 후 북장로회 선교사로 1885년 6월 21일 조선에 들어오게 됩니다. 입국한 후에는 알렌, 언더우드와 함께 제중원에서 의사로서 일했습니다. 20대 후반의 열정에 넘친 세 신참 선교사들은 낯선 환경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서로 간에 많은 갈등이 빚어지기도 하였습니다. 당시 조선의 위생환경은 매우 불결하였습니다. 천연두나 장티푸스 같은 전염병이 연례 행사처럼 창궐해서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수많은 목숨을 앗아 가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열악한 환경에 질려서 일부 선교사는 바로 자신의 나라로 귀국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조선인들을 돌보던 선교사들도 있었고, 이들 가운데 몇 사람은 그만 자신이 전염병에 희생되기도 하였습니다. 헤론 역시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많은 환자들을 돌보다가 그만 이질에 걸려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이 때, 헤론의 병상을 3주 동안 불철주야 지킨 사람은 언더우드였습니다. 선교 초기 갈등을 빚기도 했던 두 사람의 우정은 이때 극적으로 회복되었습니다. 헤론의 유가족으로 아내와 어린 두 딸이 남았는데, 헤론은 아내에게 조선에 계속 남아서 선교의 일을 계속 하기 원한다고 부탁 하였습니다. 또한 조선인 하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천국에서 다시 만날 것도 부탁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헤론은 ‘나의 사역이 참 보잘 것 없었지만, 그것이 모두 예수님을 위한 것이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2013년 8월 20일 화요일

선교사 이야기: 소다가이치


참조:http://www.yanghwajin.net/v2/mission/mission_12.html 
소다 가이치는 양화진에 안장되어 있는 유일한 일본인이며, 또한 한국정부로부터 처음으로 문화훈장을 받은 일본인이기도 합니다.
그가 한일 간의 국교가 정상화되기도 전에 이렇게 한국인들로부터 특별한 대우를 받은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소다와 그의 부인이 한국 고아들을 위해서 삶을 바쳤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의 젊은 시절은 홍콩에서 대만을 거치는 방황과 혼란의 연속이었습니다. 대만에서 쑨원(손문)의 혁명운동에도 가담하였고 산악지대를 방랑하다가 여러 번 죽을 고비도 넘겼습니다.
이렇게 방황하던 소다가 어느 날 술에 만취된 채 노상에서 쓰러져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이때 무명의 한국인 한 사람이 지나가다가 그를 업고 여관으로 데려가서 치료를 해주고 밥값도 내어 주었습니다. 그는 선한 사마리아인과 같은 이 사람 덕분에 목숨을 구한 것입니다.
그로부터 6전 뒤인 1905년, 소다는 은인의 나라인 한국에 은혜를 갚으리라 결심하고 서울 YMCA 일본어 선생으로 취직하였습니다.
소다는 이 무렵, 수감 중 예수를 믿게 되었다가 풀려 나온 이상재 선생에게 큰 감화를 받아 기독교인이 됩니다. 그는 41세 때 독실한 신앙인인 30세의 우에노 다키와 결혼합니다.

소다는 105인 사건(1911년)으로 YMCA 동료들이 누명을 쓰고 감옥에서 온갖 고문을 당하자, 일제의 만행을 공격하면서 동료들의 석방을 위해서 백방으로 힘썼습니다.
이 때 한국인들로부터 감사와 찬사도 들었지만 간사한 일제의 간첩이라는 비방도 감수해야만 했습니다.
1921년부터 45년까지 소다 부부는 천명 이상의 고아들을 돌보았습니다.
이 사역을 하면서 이들이 겪은 고생과 역경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버려진 아기를 업고 유모를 찾다가 구박을 당한 일, 소다의 고아원에서 자란 청년이 항일운동을 하다가 헌병대에 체포되어 소다가 취조를 당한 일, 거짓 위선자라고 비방 받은 일도 있었습니다. 소다는 일제의 패망 후 홀로 일본으로 돌아가서 한 손에 세계평화라는 표어를, 또 한 손에는 성경책을 들고 다니면서 조국 일본의 회개를 외쳤습니다.
한국에 남아서 고아사업을 계속하던 부인이 먼저 세상을 떠났는데, 소다는 부인의 부음소식을 듣고도 찬송과 감사를 드렸다고 합니다.
한경직 목사 등의 초청으로 94세 되던 1961년 한국으로 돌아온 소다는 영락 보린원에서 1년 동안 고아들과 함께 생활하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선교사이야기: 홀가

오후 1:18 2007-11-08

참조: http://www.yanghwajin.net/v2/mission/mission_11.html
윌리엄 홀은 캐나다 벽촌의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자수성가로 의대를 마치고 의사가 되었고,
뉴욕 빈민가에서 의료 봉사를 하면서 만난 의사 로제타와 약혼을 하였습니다. 약혼녀인 로제타는 먼저 한국에 선교를 위해 들어오고, 윌리엄은 약혼녀 보다 1년 늦은 1891년 한국에 들어와 두 사람은 서울에서 혼인을 합니다.
이들 부부는 1년 후 평양 선교 개척의 중책을 맡고 아직 채 한 살이 안된 아들과 함께 평양으로 가는데, 온갖 핍박 속에서도 이들 부부는 의료 봉사를 하면서 교회를 개척하였습니다.
1894년 평양에서 벌어진 청일전쟁 후에 부상자들과 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해서 불철주야 노력하던 윌리엄은 자신도 전염병에 걸리게 됩니다.
뒤늦게 서울로 와서 아내의 돌봄을 받았지만 1894년 11월 24일 한국에 온 지 3년 만에 아내의 품에서 세상을 뜨고 맙니다. 이때 그의 아내, 로제타는 임신 7개월 중이었습니다.
29살의 나이로 남편을 잃은 로제타는 미국으로 돌아가서 딸 에디스을 낳은 후 두 자녀를 데리고 1897년 한국으로 다시 돌아옵니다.
그녀는 평양에 남편을 기념하는 ‘기홀 병원’을 세우고 직접 부인과장으로 일하였습니다.? 이 때 사랑하는 딸 에디스도 이질로 희생되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지만 그녀의 헌신은 계속됐습니다.
그녀는 김점동(나중에 박에스더라고 불림)이라는 한 여성을 미국에까지 데리고 가서 의학교육을 시켰습니다. 박에스더는 의학공부를 마치고 한국 최초의 여의사가 되었습니다. 로제타는 한글 맞춤법에 맞는 점자법도 개발하여서 최초의 시각장애인 학교를 세우기도 하였으며, 여성 의사와 간호사를 양성하는 일에도 헌신하였습니다.
남편과 딸을 잃으면서도 그녀의 헌신은 43년이나 지속되었습니다.
이들의 아들, 셔우드 홀은 토론토 의대를 졸업하고 역시 의사이던 부인 메리언과 함께 한국에 와서 16년 동안 의료 선교를 하였습니다. 그는 특히 폐결핵을 치료하는 전문가가 되었는데 그것은 이모처럼 따르던 박에스더가 폐결핵으로 희생되었기 때문입니다.
셔우드 홀은 해주에 최초의 폐결핵 요양원을 세우고 환자들을 돌보았습니다. 당시 폐결핵 환자는 사회에서 완전히 격리된 채 비참한 생활을 감수해야만 했는데 셔우드가 이들에게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뻗은 것입니다.
또한 그는 한국 최초의 크리스마스 씰을 만들어 결핵환자들을 돕기도 했습니다.
그는 1940년 크리스마스 씰로 독립자금을 모았다는 등 일제가 꾸민 간첩혐의로 체포되었다가 겨우 풀려나 한국을 떠나게 됩니다.
한국을 떠나기 바로 직전 미국 선교본부로부터 인도에 의료선교사로 가라는 서신을 받았고, 그의 가족들은 지체 않고 일본으로 가서 인도로 가는 배를 바로 탔습니다.
셔우드 홀 부부는 인도에서 1963년까지 결핵퇴치운동을 벌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