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8월 27일 화요일

선교사 이야기: 문준경 전도사

문준경 전도사




한국교회의 중추적 역할을 감당하는 수많은 목회자들이 문준경전도사가 설립한 섬교회를 통해 배출하였다.

한국의 수많은 순교자 가운데 여성순교자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그 이유는 순교자가 집중적으로 나온 일제시대나 6·25사변 당시는 여성이 사역자로 활동하는 경우가 극히 적었으며 남존여비 사상이 지배적이라 여성의 활동영역이 매우 제한되고 또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성결교단의 문준경(文俊卿·1891∼1950)전도사의 경우는 여성사역자로서 성결교를 대표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녀의 헌신적인 사역과 활동이 순교 49년이 지난 지금까지 많은 교회와 성도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문전도사가 고향인 전남 신안군의 섬들에 설립한 증동리교회,진리교회,대초리교회 등 10여 교회는 오늘날 기독교를 대표하는 수많은 목회자들(김준곤 이만신 정태기 이만성 이봉성목사 등 30여명)을 배출하는 믿음의 산실이 되었다.그녀의 복음전파에 대한 열정과 헌신,사역은 섬을 중심으로 한 호남선교의 한 축을 이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남 신안군 암태면 수곡리의 작은 섬에서 출생한 문준경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부지런해 주위의 칭찬과 기대를 한몸에 받았다.서당에서 글공부를 하고 싶어 했으나 부친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고 1908년 17세의 나이에 신랑의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한 채 중매결혼을 해야 했다.




문준경전도사는 결혼을 했다는 이유로 정규학생이 되지 못했고 그나마 이성봉목사의 추천으로 경성성서학원에 입학해 청강생으로 신학을 공부했다. 1933년의 문준경전도사(점선).

그러나 서로 마음이 합하지 않은 결혼은 두사람 모두에게 고통이었다.외지를 도는 남편은 아내를 돌보지 않은 채 목포에 소실을 두고 자녀까지 낳아 살고 있었고 문준경은 이 때부터 자신은 ‘남편있는 생과부’라며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지내야 했다.그러나 며느리로서 시부모를 극진히 모시고 형제간의 우의를 돈독히 하는 데는 한치의 어긋남이 없었다.그리고 남는 시간을 시부모님의 허락을 얻어 국문을 깨우치고 한문을 공부하는데 할애했다.

자신을 극진히 아껴주던 시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시어머니도 큰 시숙과 생활하게 돼 갈 곳이 없어진 그녀는 목포로 건너와 단칸방에서 삯바느질을 하며 외롭고 고달픈 삶을 살았다.이런 그녀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한줄기 놀라운 빛으로 다가왔다.예수를 믿으면 삶의 기쁨과 감사가 넘친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간 교회가 유명한 성결교부흥사인 이성봉(李聖鳳)목사(당시 전도사)가 초가집 한간을 얻어 막 개척을 시작한 북교동성결교회였다.

이성봉목사의 설교는 미래에 대한 희망도 낙도 없었던 그녀에게 마음의 변화를 일으키게 했다.주님이 주시는 사랑과 평안은 그녀에게 새로운 삶의 기대와 기쁨을 채워 주었다.1년만에 학습과 세례를 받고 개인전도와 축호전도에 가장 열성을 보이는 성도가 되었다.

집사직분을 받은 그녀는 하나님 앞에 자신의 인생을 헌신할 것을 서원하고 죽을 때까지 복음을 전하겠다고 다짐했다.그리고 서울에 있는 경성성서학원(서울신대전신)에서 공부할 수 있게 되길 간절히 기도한 결과 청강생으로 입학을 할 수 있었다.당시 결혼한 여자는 입학할 수 없는 관례가 있었기 때문이다.공부를 열심히 해도 정규학생이 아니라는 이유로 장학금도 받지 못하는 등 어려움을 겪던 그녀는 이성봉목사의 보증과 요청으로 결국 정규학생이 되어 기숙사에도 들어갈 수 있었다.

문전도사의 전도열정은 남달라 방학마다 고향으로 내려가 33년 진리교회를 설립한 것을 시작으로 35년 증동리교회,36년 대초리교회를 차례로 건립했다.방축리에는 기도소를 지었다.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상태에서 오직 믿음만으로 교회를 세운 그녀에게 수많은 어려움과 고초가 쉬지않고 따랐으나 기도는 언제나 승리를 안겨 주었다.

졸업 후에도 대도시를 마다하고 증도로 돌아 온 문전도사는 나룻배를 타고 이섬 저섬 무교회지역을 돌며 교회를 개척하고 복음을 전했다.그녀는 주민들의 부탁으로 짐꾼노릇,우체부노릇을 마다하지 않았고 섬주위 돌짝밭길을 얼마나 걸었는지 1년에 고무신을 아홉컬레나 바꿔신었다고 전해진다.문전도사의 열정적인 기도는 신유의 은사까지 더해 정신병자,중풍병자를 고쳐내 ‘섬 여의사’란 말까지 들을 정도였다.

1943년 일제의 탄압으로 성결교단이 강제해산됨과 동시에 문전도사가 개척한 증도교회에까지 여파가 미쳤다.그녀가 신사참배를 거부했다며 목포경찰서로 불러내 고문을 일삼았다.

이 때마다 문전도사는 찬송가 “환란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지켰네”를 부르며 에스더서 4장16절 “죽으면 죽으리라”를 수없이 되풀이 했다.아무리 회유와 협박이 이어져도 굴욕적인 신사참배는 허락치 않았다.

그런데 해방후 공산당을 따르는 좌익들의 활동은 이 작은 섬까지 영향을 미쳤다.특히 6·25 후 지역 전체가 인민군의 손길에 넘어가자 평소 교회를 못마땅하게 여겼던 이들이 문전도사와 성도들을 못살게 굴었다.

50년 10월 4일.국군이 증동리섬까지 들어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악의에 찬 공산당원들은 교인과 양민들을 바닷가 모래사장으로 이끌어 냈다.그리고 한사람씩 단도로 내려쳐 죽이는 엄청난 만행을 저질렀다.문전도사에게 와서는 “새끼를 많이 깐 씨암탉이구만”이라며 몽둥이로 내리쳤고 그녀는 “아버지여 내 영혼을 받으소서”라는 마지막말을 남기고 이어진 총탄에 의해 순교했다.당시 59세.이 사실은 옆에 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수양딸 백정희전도사에 의해 알려졌다.

문전도사의 헌신과 사역은 한톨의 밀알이 되어 30배,60배,1백배의 열매를 거두었다.그녀가 흘린 피는 영원히 시들지 않는 꽃으로 우리 곁에 남아 있다.


<내가 본 문준경전도사… 김준곤목사(한국대학생선교회 총재)>

내 삶과 신앙에 가장 큰 영향을 준 분이 바로 순교자 문준경전도사님이다.전도사님은 내가 국민학교시절 외롭게 사시던 어머니를 위해 나룻배를 두번이나 갈아타고 찾아오시곤 했다.한아름의 과자선물과 함께 나를 껴안고 간절히 기도해 주시던 기억이 새롭다.문전도사님이 특유의 아름다운 음성으로 희망가나 천당가를 부르면 동네 아낙들이 모두 모였고 이 때부터 일장 전도가 시작됐다.

내가 신학교를 졸업하고 몸이 약해 전도사님이 사역하던 섬에서 3개월간 지낸 적이 있다.교회와 사택은 가난하고 갈 곳 없는 이들의 휴식처였다.밤낮을 가리지 않고 이곳 저곳을 다니며 아기를 받고 병을 치료해 주고 사랑이 가득 담긴 기도를 아끼지 않았다.일제시대에 장티푸스가 나돌아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고 가족도 환자곁에 가지 않는 가운데 “나는 죽어도 홀몸이니 부담이 없다”며 환자를 돌본 이야기는 유명하다.순교 1주년이 된 전도사님의 환갑날,장례추모식장에는 그녀에게 도움을 받은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김구선생 장례식 보다 추모인파가 많다’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추모와 사랑과 존경을 전도사님의 영전에 드린다.

/김무정 moojeong@kukminilbo.co.kr

2013년 8월 26일 월요일

한국 교회 처음 예배당



한국교회 처음 예배당


구본선 지음/장석철 사진/홍성사 펴냄/17,000원
우리나라엔 백 년 이상의 역사를 간직한 교회가 5백 곳이 넘는다. 그중 옛 모습 그대로의 예배당이 남아 있는 곳은 얼마나 될까? 서른 곳도 채 되지 않아 이 한 권의 책 속에 다 담겼다.(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한국 교회의 1세대 예배당 24곳의 역사를 글과 사진으로 엮어낸 이 책에는 저자가 직접 다니며 취재한, 교회마다의 고유한 역사와 신앙이 담겨 있다.

“역사가 오랜 교회에 가면 보물찾기에 열중하게 된다. 가장 먼저 찾은 것은 기도상(祈禱床)이다. 1916년 트롤로프 주교가 내려올 때 서울 교인들이 만들어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가로 버팀목에는 ‘경성성공회 구주강생 1916년’이라 쓰여 있다. …예수원 설립자 대천덕 신부의 부인 현재인 사모가 1973년에 그린 성화를 안 보고 갈 수 없다. 성자 마르틴을 그린 것이다.”(136~137쪽)
성자 마르틴은 음성교회의 수호성인으로, 지나가는 거지에게 자신의 망토 반을 잘라주었다는 4세기 프랑스 주교다. 예부터 충북 음성은 가난한 동네다. 성전을 지을 능력이 없던 교인들은 ‘부자 현씨’ 집안에서 집을 새로 짓는다면서 헐어 버린 집의 목재를 가져와 성전을 지었다. 음성에 있는 성공회 예배당 중 세 곳이 기독교 문화재이나, 이 교회는 헌 집을 뜯어다 지었기 때문에 문화재 가치가 없다는 평가를 받았단다. 고유의 역사, 무형의 역사를 보지 못한 탓이다.

서울 승동교회도 기둥이 전혀 없이 지어진 예배당을 지켜내고 있다. 세월의 무게 앞에 곳곳에 균열이 생기고, 붕괴의 위험이 있어도 꿋꿋이 교회당을 지켜가고 있다. 예배당은 곧 교회 공동체가 간직하고픈 고유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낡은 건물을 허물고, 크고 웅장한 교회 짓기를 즐기는 이유는 어쩌면 지키고픈 추억이 없어서는 아닐까.

《한국 교회 처음 예배당》은, 언제 어떻게 헐리게 될지 모를 교회의 모습을 담았기에 더욱 의미 있는 책이다. 부록에는 이들 교회의 주소와 관련 정보가 실렸다. 직접 방문해서 신앙 선배들의 ‘처음 믿음’들을 온몸으로 느끼라는 배려일 것이다. 

2013년 8월 23일 금요일

선교사이야기: A. B. 터너

한국 성공회는 코르프에 의해서 1890년 시작되었습니다. 성공회 선교사들은 한국어와 문화를 익히면서 
몇 해 동안 선교를 준비하였습니다. 
이들 성공회 선교사들은 거의 옥스포드와 캠브리지 대학교 출신의 엘리트들이었습니다.
선교사들은 1896년 성탄절 전야에 비로소 몇 사람에게 성세를 베풀었고 점차 교회로서 형태를 갖추어갔습니다. 이 무렵 터너가 한국에 들어왔습니다.
그는 옥스포드대학을 졸업하고, 
사제로 서품을 받은 지 8년 만에 한국에 부임하였습니다.
터너는 1904년 초대 코르프를 이어 제 2대 주교가 된 후 주로 인천과 강화도에 집중되어 있던 성공회의 선교 영역을 수원과 충북 진천까지 확대하였습니다.
터너는 YMCA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하였는데, 1907년에서 1910년 한일합방에 이르는 어려운 시기에 YMCA 회장을 맡으면서 이상재, 윤치호 등의 항일운동을 뒷받침하였습니다.
터너는 미국 백화점왕 워너메이커의 후원으로 YMCA의 새 건물을 신축하는 일도 추진하였으며,
상동교회 출신의 전덕기와 YMCA의 이상재, 이승만, 김규식 등을 규합하여서 기독교 연합 세력을 만드는 일에도 힘썼습니다.
터너는 신자들에게 다음의 신앙 원리를 가르치고 직접 실천하였습니다. 
첫째, 현실 문제를 도외시한 신앙은 죽은 신앙이다.
둘째, 성공회 신자들은 친일 단체인 일진회에 절대로 동참해서는 안 되고 불의와 싸우는 항일운동에 참여하여야 한다.
셋째, 기복적인 신앙을 추구해서는 안 되고 순수한 동기로 신앙을 가져야 한다.
그는 외국인 선교사가 교회를 직접 경영하면서 모든 경비를 전담하는 것은 장기적으로 많은 문제를 야기할 것이므로 한국교인들에 의한 자치와 자립을 추구하였습니다.
이런 뜻에 따라 교인들 스스로의 힘으로 세워진 교회로는 강화 온수리교회와 진천교회 등이 있습니다. 강화 온수리교회 뜰 안에는 그의 덕을 기리는 공덕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참고:  http://www.yanghwajin.net/v2/mission/mission_15.html

선교사이야기:레이놀즈

레이놀즈는 남장로회 개척 선교사이면서 한글성경번역에 크게 공헌하였던 선교사입니다.
그는 햄펀시드니 대학을 최우등으로 졸업하였는데, 특별히 언어에 재능이 많아서 신학교에서 성서원어와 라틴어를 열심히 공부하였습니다.

레이놀즈가 한국에 선교사로 오게 된 것은 언더우드의 영향 때문이었습니다.
언더우드는 안식년 기간에 미국에서 열린 해외선교 신학교연맹 대회에서 한국선교에 대해서 연설하였는데, 마침 그 곳에 있던 레이놀즈와 몇 사람의 신학생들은 크게 감동을 받아서 한국선교를 자원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들이 소속된 남장로회 선교부와 교회 어디에서도 한국선교에 관심이 없어서 선교후원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언더우드의 친형과 언더우드가 남장로회에 이들의 선교비 명목으로 3천 달러를 헌금해서 이들은 마침내 1892년 한국으로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이들이 레이놀즈 부부를 비롯한 7인의 남장로회 개척 선교사들이었습니다. 이듬해 열린 장로회선교사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남장로회는 전라도와 충청도 지역에서 주로 선교활동을 펼치게 되었습니다.
레이놀즈는 전라도 여러 곳을 다니면서 선교활동을 하였습니다.
레이놀즈는 1895년 성경번역위원회 남장로회 대표로 선임되면서,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는 일에 매진할 수 있었습니다.
성경번역은 외국인선교사와 한국어 선생의 공동작업이라고 할 만큼 한국어 선생의 역할은 지대할 수 밖에 없었는데, 레이놀즈가 한글성경번역에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박학다식한 한국어 선생 김필수의 공이 컸습니다.

파나마 운하를 건설하는 것에 비유될 수 있을 정도로 성경번역의 과정은 길고 힘든 여정이었습니다. 하지만 끈기있게 일을 진행하던 레이놀즈는 마침내 그 열매를 보게 되었습니다.
한 권씩 개인역이나 수정역으로 나오던 신약 전체를 묶어서 1900년 단권 신약성경을 출판한 것입니다. 출판된 성경에서 여러 가지 오류가 발견되자 레이놀즈와 언더우드, 게일은 아예 성경번역에만 매달립니다.
이들은 1902년 부터 1906년까지 무려 555회의 토론과 수정 과정을 거친 후에 최초의 공인역본 신약전서를 출판하였습니다.
히브리어에 정통하였던 레이놀즈는 1910년 구역성경의 출판에서도 주역의 역할을 하여서,
신·구약 성경 한 권이 온전히 출판되는 일에 쓰임 받았습니다.
레이놀즈는 1917년부터 20년 동안 평양장로회신학교 어학교수와 <신학지남> 편집인으로도 일하였습니다.
신학지남은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에서 간행한 기독교신학연구지로,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 교수들의 신학연구논문을 출판하기 위하여 만든 책이며, 장로교회의 신학이해와 신앙영위를 제시해주는 동시에 목사들의 신학 연구를 북돋고 뛰어난 목회자, 설교자가 되도록 도와주기도 했습니다.
이 연구지는 현재까지도 장로회 신학대학측의 <교회와 신학>, 총신대학측의 <신학지남>으로 계속 간행되고 있습니다. 양화진에는 채 한 살이 되기 전 한국에서 죽은 맏아들과 미국에서 76세로 죽은 둘째 아들의 무덤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참조: http://www.yanghwajin.net/v2/mission/mission_14.html

선교사 이야기: 헤론

양화진에 최초로 안장된 인물은 헤론입니다. 헤론은 테네시 대학 의대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이미 20대에 모교의 교수로 초빙 받은 수재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수재로서 보장된 길을 선택하지 않고, 헤티와 결혼한 후 북장로회 선교사로 1885년 6월 21일 조선에 들어오게 됩니다. 입국한 후에는 알렌, 언더우드와 함께 제중원에서 의사로서 일했습니다. 20대 후반의 열정에 넘친 세 신참 선교사들은 낯선 환경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서로 간에 많은 갈등이 빚어지기도 하였습니다. 당시 조선의 위생환경은 매우 불결하였습니다. 천연두나 장티푸스 같은 전염병이 연례 행사처럼 창궐해서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수많은 목숨을 앗아 가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열악한 환경에 질려서 일부 선교사는 바로 자신의 나라로 귀국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조선인들을 돌보던 선교사들도 있었고, 이들 가운데 몇 사람은 그만 자신이 전염병에 희생되기도 하였습니다. 헤론 역시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많은 환자들을 돌보다가 그만 이질에 걸려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이 때, 헤론의 병상을 3주 동안 불철주야 지킨 사람은 언더우드였습니다. 선교 초기 갈등을 빚기도 했던 두 사람의 우정은 이때 극적으로 회복되었습니다. 헤론의 유가족으로 아내와 어린 두 딸이 남았는데, 헤론은 아내에게 조선에 계속 남아서 선교의 일을 계속 하기 원한다고 부탁 하였습니다. 또한 조선인 하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천국에서 다시 만날 것도 부탁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헤론은 ‘나의 사역이 참 보잘 것 없었지만, 그것이 모두 예수님을 위한 것이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2013년 8월 20일 화요일

선교사 이야기: 소다가이치


참조:http://www.yanghwajin.net/v2/mission/mission_12.html 
소다 가이치는 양화진에 안장되어 있는 유일한 일본인이며, 또한 한국정부로부터 처음으로 문화훈장을 받은 일본인이기도 합니다.
그가 한일 간의 국교가 정상화되기도 전에 이렇게 한국인들로부터 특별한 대우를 받은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소다와 그의 부인이 한국 고아들을 위해서 삶을 바쳤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의 젊은 시절은 홍콩에서 대만을 거치는 방황과 혼란의 연속이었습니다. 대만에서 쑨원(손문)의 혁명운동에도 가담하였고 산악지대를 방랑하다가 여러 번 죽을 고비도 넘겼습니다.
이렇게 방황하던 소다가 어느 날 술에 만취된 채 노상에서 쓰러져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이때 무명의 한국인 한 사람이 지나가다가 그를 업고 여관으로 데려가서 치료를 해주고 밥값도 내어 주었습니다. 그는 선한 사마리아인과 같은 이 사람 덕분에 목숨을 구한 것입니다.
그로부터 6전 뒤인 1905년, 소다는 은인의 나라인 한국에 은혜를 갚으리라 결심하고 서울 YMCA 일본어 선생으로 취직하였습니다.
소다는 이 무렵, 수감 중 예수를 믿게 되었다가 풀려 나온 이상재 선생에게 큰 감화를 받아 기독교인이 됩니다. 그는 41세 때 독실한 신앙인인 30세의 우에노 다키와 결혼합니다.

소다는 105인 사건(1911년)으로 YMCA 동료들이 누명을 쓰고 감옥에서 온갖 고문을 당하자, 일제의 만행을 공격하면서 동료들의 석방을 위해서 백방으로 힘썼습니다.
이 때 한국인들로부터 감사와 찬사도 들었지만 간사한 일제의 간첩이라는 비방도 감수해야만 했습니다.
1921년부터 45년까지 소다 부부는 천명 이상의 고아들을 돌보았습니다.
이 사역을 하면서 이들이 겪은 고생과 역경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버려진 아기를 업고 유모를 찾다가 구박을 당한 일, 소다의 고아원에서 자란 청년이 항일운동을 하다가 헌병대에 체포되어 소다가 취조를 당한 일, 거짓 위선자라고 비방 받은 일도 있었습니다. 소다는 일제의 패망 후 홀로 일본으로 돌아가서 한 손에 세계평화라는 표어를, 또 한 손에는 성경책을 들고 다니면서 조국 일본의 회개를 외쳤습니다.
한국에 남아서 고아사업을 계속하던 부인이 먼저 세상을 떠났는데, 소다는 부인의 부음소식을 듣고도 찬송과 감사를 드렸다고 합니다.
한경직 목사 등의 초청으로 94세 되던 1961년 한국으로 돌아온 소다는 영락 보린원에서 1년 동안 고아들과 함께 생활하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선교사이야기: 홀가

오후 1:18 2007-11-08

참조: http://www.yanghwajin.net/v2/mission/mission_11.html
윌리엄 홀은 캐나다 벽촌의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자수성가로 의대를 마치고 의사가 되었고,
뉴욕 빈민가에서 의료 봉사를 하면서 만난 의사 로제타와 약혼을 하였습니다. 약혼녀인 로제타는 먼저 한국에 선교를 위해 들어오고, 윌리엄은 약혼녀 보다 1년 늦은 1891년 한국에 들어와 두 사람은 서울에서 혼인을 합니다.
이들 부부는 1년 후 평양 선교 개척의 중책을 맡고 아직 채 한 살이 안된 아들과 함께 평양으로 가는데, 온갖 핍박 속에서도 이들 부부는 의료 봉사를 하면서 교회를 개척하였습니다.
1894년 평양에서 벌어진 청일전쟁 후에 부상자들과 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해서 불철주야 노력하던 윌리엄은 자신도 전염병에 걸리게 됩니다.
뒤늦게 서울로 와서 아내의 돌봄을 받았지만 1894년 11월 24일 한국에 온 지 3년 만에 아내의 품에서 세상을 뜨고 맙니다. 이때 그의 아내, 로제타는 임신 7개월 중이었습니다.
29살의 나이로 남편을 잃은 로제타는 미국으로 돌아가서 딸 에디스을 낳은 후 두 자녀를 데리고 1897년 한국으로 다시 돌아옵니다.
그녀는 평양에 남편을 기념하는 ‘기홀 병원’을 세우고 직접 부인과장으로 일하였습니다.? 이 때 사랑하는 딸 에디스도 이질로 희생되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지만 그녀의 헌신은 계속됐습니다.
그녀는 김점동(나중에 박에스더라고 불림)이라는 한 여성을 미국에까지 데리고 가서 의학교육을 시켰습니다. 박에스더는 의학공부를 마치고 한국 최초의 여의사가 되었습니다. 로제타는 한글 맞춤법에 맞는 점자법도 개발하여서 최초의 시각장애인 학교를 세우기도 하였으며, 여성 의사와 간호사를 양성하는 일에도 헌신하였습니다.
남편과 딸을 잃으면서도 그녀의 헌신은 43년이나 지속되었습니다.
이들의 아들, 셔우드 홀은 토론토 의대를 졸업하고 역시 의사이던 부인 메리언과 함께 한국에 와서 16년 동안 의료 선교를 하였습니다. 그는 특히 폐결핵을 치료하는 전문가가 되었는데 그것은 이모처럼 따르던 박에스더가 폐결핵으로 희생되었기 때문입니다.
셔우드 홀은 해주에 최초의 폐결핵 요양원을 세우고 환자들을 돌보았습니다. 당시 폐결핵 환자는 사회에서 완전히 격리된 채 비참한 생활을 감수해야만 했는데 셔우드가 이들에게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뻗은 것입니다.
또한 그는 한국 최초의 크리스마스 씰을 만들어 결핵환자들을 돕기도 했습니다.
그는 1940년 크리스마스 씰로 독립자금을 모았다는 등 일제가 꾸민 간첩혐의로 체포되었다가 겨우 풀려나 한국을 떠나게 됩니다.
한국을 떠나기 바로 직전 미국 선교본부로부터 인도에 의료선교사로 가라는 서신을 받았고, 그의 가족들은 지체 않고 일본으로 가서 인도로 가는 배를 바로 탔습니다.
셔우드 홀 부부는 인도에서 1963년까지 결핵퇴치운동을 벌였습니다.

선교사 이야기:위더슨(Mary Widdowson 위도선)



참조: http://www.yanghwajin.net/v2/mission/mission_10.html
구세군의 한국 선교는 1908년 호가드 대령부부가 파송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양화진에는 몇 명의 구세군 선교사들과 어린 자녀들이 묻혀 있는데 위더슨 부인도 그들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위더슨 부인은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부모를 따라 남아프리카로 건너가 그 곳에서 성장하였습니다.
그녀는 구세군 사관으로 일하다가 1926년에 한국 선교사로 임명되어, 한국으로 떠나는 같은 구세군 크리스 위더슨과 결혼을 하고 서울에 와서 7년을 섬겼습니다. 그녀는 남편과 함께 서울 변두리의 고아원에 보금자리를 차리고 줄곧 고아들과 같이 생활하였는데, 이들의 첫아들도 물론 고아들과 친구로 같이 자랐습니다.
이들은 늘 전염병의 위험에 노출되었 있었는데, 거리에서 데려온 고아들이 여러 가지 병균을 묻혀 왔기 때문입니다.
이들 부부는 결국 발진티푸스에 걸려 고열로 시달리게 되었지만, 그런 와중에도 고아들을 걱정하였습니다.
위더슨 부부는 7년의 한국 생활 후 이번에는 아프리카 케냐로 파송되어 그곳에서 7년 동안 고아들을 돌보았습니다.
하나님은 부부에게 한창 전쟁 중이던 한국으로 가라는 음성을 듣려 주셨고 이들은 망설임 끝에 순종하였습니다. 1953년 1월 부산에 도착해서 한국 구세군 사령부를 조직하고 고아들을 돌보는 일도 계속 하였습니다.
하지만 위더슨 부인은 위암에 걸려 얼마 후인 1956년 5월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녀는 소천하면서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편에게 남겼습니다.
“나는 어린 양의 피로 구속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늘 기억하십시오. 내가 죽는다고 서러워 말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오. 오늘 나는 한국에서 하나님께로 가는 것을 무한한 기쁨으로 생각합니다.”